만들어진 현실
“옛날에는 호남 사람이 영남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간판차고 들어오질 못했어.”
하동사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전라도 사람이 휴게소에 들어왔다가는 해코지를 당한다는 말이다. 별다른 이유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막연한 적개심은 이렇게 생겨났다. 막연했던 마음이 확신으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였다. 머리 크고 접한 신문과 방송은 지역주의의 근거를 제공했다. 논리는 없었다. 다만 현존하는 지역주의를 비판하고 타파해야 한다고만 떠들어댔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저서『만들어진 현실』에서 ‘지역주의’에 대한 위와 같은 편견을 고찰한다. 그는 지역주의에 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지적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첫째, 대부분의 유권자는 지역주의에 이끌려 투표한다.
둘째, 지역을 둘러싼 편견은 옛날, 즉 근대 이전 전통 사회에서부터 존재 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강화되었다.
셋째, 지역주의의 중심 내용은 영남과 호남 사이의 지역 갈등이다.
넷째, 지역주의와 지역 구도의 고착화 정도는 매우 심하다. 선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극복하기 어렵다.
다섯째, 지역주의 때문에 정치발전이 안 되고 있다.
여섯째, 지역주의는 망국적인 고질병이다. 개헌을 통한 권력 구조 개편이나 선거제도의 변화와 같이 게임의 규칙을 바꾸거나, 정치 지도자들의 결단과 같이 뭔가 강한 외재적 힘의 개입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호남 사람들은 믿을게 못 된다.”고 흔히 생각한다. 어디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해방 후 급격한 경제 발전과 동시에 수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됐다. 이에 따라 영남 사람, 호남 사람 할 것 없이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넘쳐났다. 토박이들은 “어디 사람은 어떻다”고 주관을 떠들어대고, 이주민들 역시 “서울 사람은 약삭빠르다”고 떠들어댔다. 한 마디로 지역 편견은 너나할 것 없이 있어왔다는 것이다. 호남인만 가지고 있던 차별은 아니었던 것 같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그렇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는 거다.
이에 저자는 “지역주의 때문에 큰일이라는 해석이 어떻게 한국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나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문제가 지역주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 담론을 만들어 내고 이용하는 권력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역주의를 악용한 권력은 누구일까? 그는 1971년 선거 직후를 주목한다. 박정희는 경제 발전의 성과를 위시하여 권의주의 정권의 연장에 성공했다. 주목할 변화는 하나 더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시민의식의 성숙이다. 71년 선거에서 김대중이 턱밑까지 표차를 줄이자 박정희는 긴장했다. 본격적으로 김대중에게 빨간 색을 입히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반공의 기치를 내세우던 박정희와 달리 평화 통일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대중을 용공으로 몰아붙이고, 심지어는 납치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저지른다. 지역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은밀히 제시한 것은 이때부터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용공=호남”등식의 뼈대를 제시했다. 중요한 건, 이 당시 투표 결과는 지역주의와는 무관했다는 점이다. 부산·대구 지역에서도 김대중은 많은 표를 얻는다.
“김대중=용공=호남”도식은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확대 생산된다. 5·18 이후 근거 없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했다. KBS, MBC,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을 그의 손아귀에 집어넣은 후 ‘3김정치타파’담론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세력은 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민주화 운동의 동력을 재가동한다. 결국 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된다.
87년 말에 있은 제13대 대통령선거는 지역주의의 정착의 토대를 마련했다. 담론 상으로 형성되던 ‘3김정치타파’등의 구호가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강한 민주화 열망을 갖던 시민 세력은 노태우 당선으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국민들은 민주화 세력의 패배 원인을 양김의 분열에서 찾았다.
민주화 이후 ‘정책’ 없는 이념적 담론 싸움이 계속 되고 국민들은 정치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정치인들 간에 국민을 위한 건강한 정책 대결은 찾아볼 수 없고 좌·우 논쟁만 심화되었다. 선거철만 되면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엇비슷한 정책을 잣대로 대표를 선출하지 않게 됐다. 지역·학력·성별·인종 따위의 단순한 차이를 고려할 뿐이다.
저자는 지역주의를 이용하고 악용하여 정권의 정당성 내지 지속성을 추구하려는 세력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인간은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실을 인식한다”라며, “사실 이전에 사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둘러싼 투쟁이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이데올로기를 선점하려는 기존 권력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역주의 담론이 가진 문제가 쉽게 사라지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지역주의는 권력 지속과 유지를 위해 조장되고 선동된 것이다. 현존하는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가들이 정책 대결 아닌 이념 대결로의 건전하지 못한 싸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지역주의가 해소된다고 해서 꿈같이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정치 발전이 한 번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광주를 비롯한 호남의 정서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합리적 동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적 담론을 들이대면 이성과 감성이 골고루 섞여있는 개체다. 따라서 정치적인 선택에 직면할 때, 합리성만을 잣대로 대표를 선출할 순 없다. 예컨대 호남 사람이 김대중과 민주당을 선택하는 이유는 이성과 감성 어느 잣대일까? 두 가지 모두 섞여있겠지만, 5·18 당시 아무런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분노를 이성의 영역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불가능 하리라 본다. 그들이 갖는 군사정권와 국가에 대한 분노는 그것이 비이성적이라 일컬어질지라도 정당하다. 이런 방식의 지역주의를 타도해야할 대상이라고 공세를 펴는 건 역사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라 생각된다. 다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담론들(노동자 처우 개선, 다문화 가정의 제도권 이식 등)을 구체 정치에 실현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미시적 담론이 지역주의와 같은 추상적 거시 담론을 밀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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